[초등 등산] 준비 없이 오른 북한산 비봉 코스: 진흥왕 순수비를 찾아 떠난 눈길 산행

 경주 여행에서 문무대왕릉의 동해 파도를 보며 삼국통일의 서사를 나눈 뒤, 우리 가족에게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습니다. 바로 신라 진흥왕이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세웠다는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를 직접 눈으로 확인해 보자는 것이었죠.

역사책 속 한 구절을 따라가겠다는 설레는 동기 하나만으로, 일요일 아침 우리는 가벼운 마음으로 북한산 비봉 코스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산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무거웠습니다.

1. 패딩부츠와 러닝화, 무지했던 엄마의 식은땀

우리는 등산에 대해 너무나 무지한 초보 산행자였습니다. 제대로 된 등산화 하나 없이, 아이들은 패딩부츠와 농구화를, 저는 가벼운 러닝화를 신고 산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산은 유독 거친 바위와 돌이 많은 산이더군요. 얼마 올라가지 않아 발끝에서부터 거친 돌길의 촉감이 그대로 전해졌습니다. 미끄러운 바위를 위태롭게 디디며 올라가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습니다. ‘아이들을 이끌고 온 엄마가 너무 무지했구나.’ 이 험한 바위산에 아이들을 이런 차림으로 데려오다니, 미안함과 자책감에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습니다.

2. "아이고, 씩씩해라!" 길 위에서 만난 다정한 응원들

엄마의 마음은 조마조마함으로 가득 찼지만, 정작 아이들을 일으켜 세운 건 길 위에서 마주친 이웃들의 다정한 목소리였습니다.

험한 돌길을 영차영차 오르는 주주들을 보며, 내려오시던 등산객들이 가던 길을 멈추고 한마디씩 건네주셨습니다. "아이고, 녀석들 참 대단하네!", "어쩜 이렇게 씩씩하게 잘 올라오니!"

평소라면 낯설어했을 법도 한데, 오고 가는 사람들의 칭찬과 응원이 아이들에게는 커다란 에너지 주사 맞은 듯 효과가 있었나 봅니다. 힘든 내색 대신 힘이 잔뜩 들어간 발걸음으로 산을 오르며, 아이들은 이때부터 등산의 묘한 재미를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엄마, 난 이렇게 돌이 딛기 좋은 산이 더 재밌어!"라며 해맑게 웃는 아이들을 보며, 자연이 주는 거친 자극이 아이들을 자라게 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습니다.

3. 겨울이 남아있는 정상: 안전과 도전의 갈림길


문제는 산을 위로 치고 올라갈수록 더 묵직하게 다가왔습니다. 3월 초순의 북한산 자락은 아래쪽의 봄기운과 달리, 위로 올라갈수록 하얗게 눈이 쌓여 있었습니다.

중간쯤 올랐을 때, 배낭에서 아이젠을 꺼내 착용하는 전문 등산객들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꽁꽁 얼어붙은 미끄러운 빙판길을 마주한 순간, 제 발걸음은 멈춰 섰습니다. ‘여기서 그만 내려갈 것인가, 아니면 조금 더 가볼 것인가.’ 안전을 위해선 지금 돌아서는 게 맞다는 이성과, 조금만 더 가면 순수비가 있는 비봉이라는 아쉬움이 팽팽하게 맞섰습니다.

고민하는 저를 이끈 건 오히려 아이들이었습니다. "엄마, 우리 조금만 더 가보고 정말 안 되겠으면 내려가자. 끝까지 가보고 싶어."

결국 무거운 책임감과 염려를 양어깨에 짊어진 채, 아이들의 손을 더 꽉 쥐고 조심스럽게 한 발자국씩 눈길을 디디며 올라가기로 결정했습니다.

4. 멈춰 선 자리, 그리고 아래서 올려다본 진흥왕의 기개

마침내 도달한 정상부, 비봉 위에서 바라본 서울의 풍경은 말도 안 되게 아름다웠습니다. 차가운 겨울 눈을 머리에 이고, 저 멀리 따스한 봄빛을 품은 서울 도심과 한강 줄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조망은 가슴이 시리도록 장엄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찾던 진흥왕 순수비는 거대한 바위 꼭대기 위, 네 발로 기어올라 가야 하는 아찔한 곳에 서 있었습니다. 제대로 된 장비도 없이 눈 녹은 바위 위를 아이들과 오르는 것은 무모한 일이었죠. 우리는 무리해서 끝까지 올라가는 대신, 그 바로 아래 안전한 곳에 멈춰 서기로 했습니다.

비석의 뒷모습만 어렴풋이 아래서 올려다보아야 했던 아쉬운 멈춤이었지만, 그 자리에서 느낀 감동은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1,400여 년 전 백제를 밀어내고 이 한강 유역을 마침내 품에 안은 진흥왕이 왜 이 거친 바위산 꼭대기를 선택했는지, 발아래 펼쳐진 풍경만으로도 단번에 이해가 되었으니까요. 영토 확장의 위업을 달성한 왕이 느꼈을 그 당찬 기개와 떨림이, 시간을 뛰어넘어 올려다보는 우리의 시선 끝에도 그대로 전해지는 듯했습니다.

동시에 주주와 저는 어렴풋이 보이는 저 비석을 보며 또 다른 감탄에 잠겼습니다. "엄마, 우리는 맨몸으로 이 아래까지 오기도 이렇게 힘든데, 옛날 사람들은 그 무거운 돌을 지고 저 뾰족한 바위 꼭대기까지 어떻게 올라가서 세웠을까?"

지금처럼 정비된 산길이나 안전장치가 전혀 없었을 그 옛날, 깎아지른 듯한 바위벽을 타며 그 거대한 비석을 짊어지고 올라왔을 장인들과 백성들의 치열한 집념과 고단한 땀방울이 그려져 숙연해지기까지 했습니다. 비봉은 우리에게 비석의 앞모습을 허락하진 않았지만, 아래서 올려다보는 방식을 통해 신라 인들의 거대한 스케일과 집념을 더 깊이 사유하게 해주었습니다.

🏛️ 주주네 기록 한 뼘: 엄마의 단상

내려오는 길은 올라갈 때보다 몇 배는 더 조심스러웠지만, 우리 가족의 마음에는 이 거친 산이 준 단단한 무늬가 하나씩 새겨졌습니다.

무지했던 엄마의 조바심 속에서도 칭찬을 자양분 삼아 씩씩하게 바위를 타던 아이들. 안전과 도전의 갈림길에서 스스로 조금 더 가보자고 용기를 냈던 주주들의 성장. 그리고 마지막 순간, 더 큰 위험 앞에서 욕심내지 않고 '아래서 올려다보는 법'을 배운 단호한 멈춤까지.

북한산의 거친 돌길과 뜻밖의 하얀 눈밭은, 우리 주주들에게 "조금 더 단단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살아있는 인문학 교실이었습니다.  다음 산행은 조금 더 안전하게, 하지만 이번에 배운 그 씩씩한 마음과 현명한 멈춤은 그대로 품고 다시 한번 길을 나서보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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